다누마 오키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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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누마 오키쓰구는 1719년 에도에서 태어난 하타모토 출신으로,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사가라 번주를 거쳐 로주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막부 재정 개선을 시도했으나, 뇌물 수수와 같은 부정부패로 비판받았다. 홋카이도 개발을 추진하고, 실용주의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1784년 아들의 암살 사건 이후 권세가 쇠퇴하여 1786년 실각했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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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누마 오키쓰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다누마 오키쓰구 |
원어 이름 | 田沼 意次 |
로마자 표기 | Tanuma Okitsugu |
출생일 | 1719년 9월 11일 |
출생지 | 에도, 도쿠가와 막부 |
사망일 | 1788년 8월 25일 |
사망지 | 에도, 도쿠가와 막부 |
묘소 | 만넨산 가쓰린지 (도쿄도도요시마구고마고메)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
직책 | 주전두 종4위 하 시종 |
막부 관직 | |
직책 | 에도 막부고쇼 고쇼구미 반가시라 오소바고요토리쓰기 소바요닌 로주 가쿠 로주 |
섬긴 쇼군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도쿠가와 이에하루 |
가문 | |
가문 | 다누마 씨 |
아버지 | 다누마 오키유키 |
어머니 | 다시로 다카치카의 양녀 다쓰 |
형제자매 | 오키쓰구 오키마코토 오키미쓰 |
배우자 | 정실: 이타미 나오카타의 딸 계실: 구로사와 사다노리의 딸 |
자녀 | 오키토모 유우지로 가쓰스케 오키마사 마쓰사부로 히지카타 가즈사다 구키 다카노리 센가 (니시오 다다쓰구의 아내) 호치인 (이이 나오아키라의 아내) 양녀: 니이미 마사노리의 딸 (오오카 다다요시의 아내 → 히지카타 가즈토시의 아내) |
영주 | |
번 | 사가라 번 |
재임 시작 | 1767년 |
재임 종료 | 1786년 |
이전 영주 | 혼다 다다나카 |
다음 영주 | 다누마 오키아키 |
기타 | |
어린 시절 이름 | 류스케 |
계명 | 류코인덴키잔료에이다이코지 |
신호 | 불명 |
2. 생애
교호 4년(1719년) 7월 27일, 에도에서 다누마 오키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류스케'''(龍助)이다. 다누마 오키유키는 기슈번의 아시가루 출신이었으나 8대 쇼군 요시무네에게 등용되어 하타모토가 된 인물이다. 오키쓰구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칠면대명신(七面大明神)[21]에게 기원하여 태어났다고 한다.[22] 1734년 제9대 쇼군이 될 이에시게의 시동으로 발탁되었고, 교호 20년(1735년) 아버지의 녹봉 600 고쿠를 물려받았다.
엔쿄 2년(1745년) 이에시게의 쇼군 취임에 따라 에도 성 혼마루 시중이 되었으며,[6] 간엔 원년(1748년) 이후 녹봉이 증가되었다. 호레키 8년(1758년) 미노노쿠니 군조 번 농민 폭동( 구리하마 이키(郡上一揆))이 일어나자 관련 재판을 맡기 위해 1만 고쿠 다이묘로 임명되었다.[6]
호레키 11년(1761년), 이에시게 사망 이후에도 후계자인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메이와 4년(1767년) 소바요닌 및 종4위하의 2만 고쿠의 사가라 성주가 되었고,[6] 안에이 원년(1772년)에는 5만 7000 고쿠의 사가라번주에 로주를 겸임하여 소바요닌에서 로주가 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6]
사가라 번주 취임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겐분 2년(1737년) | 종오위하(従五位下)·주전두(主殿頭)에 서임. |
엔쿄 4년(1747년) | 소성조(小姓組) 번두격(番頭格). |
칸엔 원년(1748년) 윤10월 1일 | 소성조 번두, 오쿠킨(奥勤) 겸무로 이동. 석고 1400석 증가. |
호레이키 원년(1751년) 4월 18일 | 오소쿠고요토리츠기(御側御用取次)측중(側衆)으로 이동. |
호레이키 5년(1755년) | 석고 3000석 증가. 지행(知行) 합계 5000석. |
호레이키 8년(1758년) | 석고 5000석 증가. 1만 석의 다이묘가 됨. 평정소(評定所) 출석 명령, 구리하마 이키(郡上一揆) 심리 담당. 도토미(遠江) 소라(相良)에 영지를 받음. |
호레이키 10년(1760년) | 9대 이에시게(家重) 은퇴, 이에하루(家治)가 10대 쇼군 취임. 이츠기(意次) 오소쿠고요토리츠기 유임. |
호레이키 12년(1762년) | 석고 5000석 증가, 합계 1만 5000석. |
메이와 4년(1767년) 7월 1일 | 측용인(側用人)으로 이동. 종시위하(従四位下)로 승서(昇叙). 석고 5000석 증가, 합계 2만 석. 도토미국 소라(相良) 2만 석의 영주. |
메이와 6년(1769년) 8월 18일 | 로쥬각(老中格)으로 이동, 측용인 겸임. 시쥬(侍従) 겸임. 석고 5000석 증가. |
메이와 9년(1772년) 1월 15일 | 로쥬(老中)로 이동. 석고 5000석 증가, 합계 3만 석. 11월 18일, 안에이(安永) 원년.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한 막부 각료들은 막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특산물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에조치 개척 시도, 외국과의 무역 확대, 시모우사 인바 늪 간척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7] 그 결과, 막부 재정은 개선되고 경기는 좋아졌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초기 자본주의화로 인해 조닌(상인)·공무원의 생활이 금전 중심으로 되고, 뇌물 수수가 횡행했다.
도시에서 조닌 문화가 발전했지만, 이윤이 적은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들이 논밭을 방치하고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농촌이 황폐화되었다. 인바 늪 운하 공사 실패 및 메이와 대화재, 아사마산 대분화 등의 재해가 발생하고, 피폐화된 농촌에는 덴메이 대기근으로 불리는 식량난과 전염병 등이 생겼다. 이에 대한 다누마의 대책이 실패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고, 다누마 정치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외국 무역을 통해 국내 금 보유량을 늘리고, 북방 러시아와의 무역을 시도하는 한편 히라가 겐나이 등과 친교를 맺어 난학을 보호하였다. 사농공상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주의에 근거한 인재 등용도 시도했지만, 급격한 개혁은 신분제와 주자학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막부 각료의 반발을 샀다. 1784년 와카도시요리였던 아들 오키토모가 에도 성 안에서 암살된 것을 계기로 권세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덴메이 6년(1786년) 8월 25일, 쇼군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다누마 오키쓰구는 실각했다.[23] 다누마 반대파와 히토쓰바시 가문의 책략이 있었다고도 한다. 8월 27일 로주에서 파면되고, 쇼군 이에하루가 증여한 2만 고쿠 회수, 오사카 저택의 재산 몰수, 에도 저택 양도 등을 명받았다. 이후 칩거 명령과 함께 2차 감봉을 당했다. 사가라 성은 파괴되고 성내 비축된 금과 곡식은 몰수되었다. 장남은 이미 사망했고, 다른 아들 셋은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손자 오키아키가 1만 고쿠가 감소된 사가라번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나 마나베 아키후사는 사임만으로 처벌받지 않고 봉급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면, 다누마 오키쓰구는 가장 가혹한 말로를 맞이한 것이다.
덴메이 8년(1788년) 6월 24일 사망했다. 향년 70세.
2. 1. 출생
교호 4년(1719년) 7월 27일, 에도에서 다누마 오키유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류스케'''(龍助)이다. 다누마 오키유키는 원래 기슈번의 아시가루 출신이었으나 8대 쇼군 요시무네에게 등용되어 하타모토가 된 인물이다. 오키쓰구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 칠면대명신(七面大明神)[21]에게 기원하여 태어났다고 한다.[22] 1734년 제9대 쇼군이 될 이에시게의 시동으로 발탁되었고, 교호 20년(1735년) 아버지의 녹봉 600 고쿠를 물려받았다.2. 2. 사가라 번주 취임
엔쿄 2년(1745년) 이에시게의 쇼군 취임에 따라 에도 성 혼마루 시중이 되었다.[6] 간엔 1년(1748년) 이후 녹봉이 증가되었고, 호레키 8년(1758년) 미노노쿠니 군조 번 농민 폭동( 구리하마 이키(郡上一揆))이 일어나자 관련 재판을 맡기 위해 1만 고쿠 다이묘로 임명되었다.[6]호레키 11년(1761년), 이에시게 사망 이후에도 후계자인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메이와 4년(1767년) 소바요닌 및 종4위하의 2만 고쿠의 사가라 성주가 되었고,[6] 안에이 1년(1772년)에는 5만 7000 고쿠의 사가라번주에 로주를 겸임하여 소바요닌에서 로주가 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6]
다음은 사가라 번주 취임까지의 과정이다.
연도 | 사건 |
---|---|
겐분 2년(1737년) | 종오위하(従五位下)·주전두(主殿頭)에 서임. |
엔쿄 4년(1747년) | 소성조(小姓組) 번두격(番頭格). |
칸엔 원년(1748년) 윤10월 1일 | 소성조 번두, 오쿠킨(奥勤) 겸무로 이동. 석고 1400석 증가. |
호레이키 원년(1751년) 4월 18일 | 오소쿠고요토리츠기(御側御用取次)측중(側衆)으로 이동. |
호레이키 5년(1755년) | 석고 3000석 증가. 지행(知行) 합계 5000석. |
호레이키 8년(1758년) | 석고 5000석 증가. 1만 석의 다이묘가 됨. 평정소(評定所) 출석 명령, 구리하마 이키(郡上一揆) 심리 담당. 도토미(遠江) 소라(相良)에 영지를 받음. |
호레이키 10년(1760년) | 9대 이에시게(家重) 은퇴, 이에하루(家治)가 10대 쇼군 취임. 이츠기(意次) 오소쿠고요토리츠기 유임. |
호레이키 12년(1762년) | 석고 5000석 증가, 합계 1만 5000석. |
메이와 4년(1767년) 7월 1일 | 측용인(側用人)으로 이동. 종시위하(従四位下)로 승서(昇叙). 석고 5000석 증가, 합계 2만 석. 도토미국 소라(相良) 2만 석의 영주. |
메이와 6년(1769년) 8월 18일 | 로쥬각(老中格)으로 이동, 측용인 겸임. 시쥬(侍従) 겸임. 석고 5000석 증가. |
메이와 9년(1772년) 1월 15일 | 로쥬(老中)로 이동. 석고 5000석 증가, 합계 3만 석. 11월 18일, 안에이(安永) 원년. |
2. 3. 다누마 시대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한 막부 각료들은 막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특산물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에조치 개척 시도, 외국과의 무역 확대, 시모우사 인바 늪 간척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7] 그 결과, 막부 재정은 개선되고 경기는 좋아졌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초기 자본주의화로 인해 조닌(상인)·공무원의 생활이 금전 중심으로 되고, 뇌물 수수가 횡행했다.도시에서 조닌 문화가 발전했지만, 이윤이 적은 농업에 종사하던 농민들이 논밭을 방치하고 도시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농촌이 황폐화되었다. 인바 늪 운하 공사 실패 및 메이와 대화재, 아사마산 대분화 등의 재해가 발생하고, 피폐화된 농촌에는 덴메이 대기근으로 불리는 식량난과 전염병 등이 생겼다. 이에 대한 다누마의 대책이 실패하면서 사태는 악화되었고, 다누마 정치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외국 무역을 통해 국내 금 보유량을 늘리고, 북방 러시아와의 무역을 시도하는 한편 히라가 겐나이 등과 친교를 맺어 난학을 보호하였다. 사농공상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주의에 근거한 인재 등용도 시도했지만, 급격한 개혁은 신분제와 주자학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막부 각료의 반발을 샀다. 1784년 와카도시요리였던 아들 오키토모가 에도 성 안에서 암살된 것을 계기로 권세가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2. 4. 실각
덴메이 6년(1786년) 8월 25일, 쇼군 이에하루가 사망하자 다누마 오키쓰구는 실각했다.[23] 다누마 반대파와 히토쓰바시 가문의 책략이 있었다고도 한다. 8월 27일 로주에서 파면되고, 쇼군 이에하루가 증여한 2만 고쿠 회수, 오사카 저택의 재산 몰수, 에도 저택 양도 등을 명받았다.이후 칩거 명령과 함께 2차 감봉을 당했다. 사가라 성은 파괴되고 성내 비축된 금과 곡식은 몰수되었다. 장남은 이미 사망했고, 다른 아들 셋은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손자 오키아키가 1만 고쿠가 감소된 사가라번주 자리를 잇게 되었다.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나 마나베 아키후사는 사임만으로 처벌받지 않고 봉급을 유지했던 것에 비하면, 다누마 오키쓰구는 가장 가혹한 말로를 맞이한 것이다.
덴메이 8년(1788년) 6월 24일 사망했다. 향년 70세.
3. 사가라 번의 번정
다누마 오키쓰구는 에도에 머물며 막부 정치에 전념했기 때문에, 사가라 번의 번정은 가신들에게 맡겼다.[7] 오키쓰구는 조카마치(성하 마을) 개조, 다누마 가도(사가라 가도) 정비, 사가라 항구 정비, 기와 굽기 장려 등 인프라 정비에 힘썼다. 연공 증징을 경계하고 영내의 연공을 가볍게 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였다. 양잠, 뤄 재배 장려, 제염업 보조, 식량 비축 제도 정비 등 척산흥업 정책을 추진하여 번정을 안정시켰다.[7]
4. 정책
다누마 오키쓰구는 당시 로주 수좌였던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추진된 여러 정책들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들은 상공업 장려와 재정 확충을 목표로 했다.
- '''농업 정책''':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양잠이나 벼 재배를 장려하고, 제염업을 보조했으며, 식량 비축 제도를 정비하여 번정을 안정시켰다.[8]
- '''조카마치 정비''': 조카마치를 개조하고, 도카이도에서 사가라로 이어지는 다누마 가도를 정비했다. 또, 사가라 항구를 정비하고, 보조금을 지급하여 기와 굽는 것을 장려하여 화재에 대비하는 등 사회 기반 시설 정비에 힘썼다.[8]
- '''신분 제도 개혁 시도''': 사농공상의 신분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려 했으나, 주자학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막부 각료들의 반발을 샀다.[8]
- '''인바 늪 간척 사업''': 시모우사의 인바 늪을 간척하는 사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8]
- '''재해 발생''': 메이와 대화재, 아사마 산 대분화 등의 재해가 발생하고, 피폐해진 농촌에는 덴메이 대기근으로 불리는 식량난과 전염병 등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다누마의 대책은 실패했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다누마 정치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8]
- '''차입금 제한''': 흉작이나 자연재해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다이묘나 하타모토를 구제하기 위해 무이자, 분할 상환으로 융자해 주는 제도인 차입금을 1771년에 제한하고, 1783년에는 전면 중단했다.[9] 이는 막부가 무사 신분을 보호하는 기능을 약화시킨 조치였다.
4. 1. 재정 정책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한 막부 각료들은 막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특산물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에조치 개척 시도, 외국과의 무역 확대, 시모우사 인바 늪 간척 등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막부 재정은 개선되고 경기도 좋아졌다.[8]다누마 오키쓰구는 교호 개혁 당시의 경비 절감 정책을 모방하여 오오쿠를 축소하고, 쇼군의 사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한 비용을 1750년에는 2만 4600냥이었던 것을 1771년에는 1만 5000냥으로 삭감했다. 1746년에 막부의 여러 관청의 경비를 2년간 절약하도록 명령하고, 1755년에는 관청별로 예산을 정하는 제도를 채택, 1764년에는 관청에서 사용하는 붓, 먹, 등유 등을 현물로 지급하는 것을 중지하고 관청 경비로 구입하도록 변경하는 등 경비 절감에 힘썼다.[9]
1757년, 다누마 오키쓰구는 기요스미 시대에 중단되었던 국가 부역(普請)을 재개했다. 막부 부역보다 국가 부역이 막부의 부담이 공사비의 1/10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유지에서의 공역(公儀普請) 시 영주 부담금을 제대로 징수할 수 있다면 말이다. 국지 다이묘와 20만 석 이상의 다이묘에게도 어수 도와 부역(御手伝普請)을 시킴으로써 막부의 부담을 줄이려 했다. 명령을 받은 다이묘들은 재정난 속에서 자신의 영토 통치와는 무관하고, 연공 증가에도 이어지지 않는 어수 도와 부역을 수행함으로써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명령을 받은 번 중에는 번정 개혁 중인 번도 있었지만 상관없이 명령을 받았고, 회복된 번 재정은 다시 빚에 잠겼다.[9] 특히 센다이 번은 1767년에 리네가와 지방의 어수 도와 부역을 명령받았는데, 이로 인해 22만 냥이라는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고, 그 이전보다 더욱 번의 이익을 추구해야만 했기에, 덴메이 대기근의 피해를 확대시켰다는 말이 있다.
막부는 이익이 큰 산업이 있는 번의 영지를 막부 영지로 편입하기 위해 상지령(上知令)을 내리려 했다.
대상 번 | 영지 및 사유 |
---|---|
아키타 번 | 아니 동산: 보력 14년(1764년) 무역용 구리 확보를 위해 5월에 상지령을 내렸으나 아키타 번의 반발이 심해 다음 달에 철회되었다. |
니시키 번 | 세쓰국 니시노미야: 메이와 6년(1769년) 등유 원료인 유채 생산 지역 1만 4천 석(石)에 달하는 마을과 도시를 대체지와 교환하여 상지령을 내렸다. |
마쓰마에 번 | 에조치: 에조치 전체를 상지하려 했으나 다누마의 실각과 함께 무산되었다. |
4. 2. 경제 정책
다누마 오키쓰구 시대에는 교호 개혁에서 공인된 주식회(株仲間)가 장려되었다.[11] 주식회는 상인들의 동업 조합으로, 막부는 이들에게 전매제(専売制) 등의 특권을 주는 대신 운상금(運上金)과 명가금(冥加金)을 세금으로 징수했다.[11]나가사키 무역을 담당했던 나가사키 회소(長崎会所)는 교호 8년(1723년) 운상(무역세)이 5만 냥으로 정해졌으나, 이후 빚이 쌓여 간엔 원년(1748년)부터 22년간 간조부교가 나가사키 부교를 겸임하며 관리 통제를 강화했다. 그 결과 빚을 갚고 운상금 1만 5천 냥을 상납하는 데 성공했다. 나가사키 무역에서는 다와라모노(俵物)(포대에 담은 상품)의 증산이 추진되었고, 은(銀)도 수출에서 수입으로 전환되었다.[11]
일반적으로 다누마 오키쓰구의 적극적인 무역 정책으로 수출이 증가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스즈키 야스코(鈴木康子)에 따르면 가이하쿠고시신레이에서 정해진 무역 총량을 초과하지 않았고, 은 수입을 대가로 구리 수출량을 증가시키지도 않아 무역 총량에는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적극적인 무역 정책에 의한 수출 증가 정책은 시행되지 않았으며, 기존의 평가는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11]
4. 3. 홋카이도(에조치) 개발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한 막부 각료들이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펼칠 때, 에조치 개척 시도가 이루어졌다.[8] 히라가 겐나이 등과 친교를 맺고 난학을 보호하던 다누마 오키쓰구는 북방 러시아와의 무역을 시도했다.[8]마쓰모토 히데모치(松本秀持)의 홋카이도 정책은 홋카이도를 개발하고 금은 광산을 개척하여 생산된 금은으로 러시아와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홋카이도 조사 결과, 러시아와의 밀무역은 우려와 달리 무역이라고 할 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결국 다누마는 홋카이도의 광산 개발과 러시아 무역을 포기했다. 다누마 실각 후, 홋카이도 개발은 일시 중단되었으나, 이후 막부에 의해 홋카이도 개발 계획이 재개되었다.
4. 4. 기타 정책
오사카 서마치 부교를 담당한 사노 마사치카(佐野政親)는 덴메이 3년(1783년)에 다이묘(大名) 융자 재원 마련을 위해 오사카 거상들에게 14만 5천 량 규모의 御用金令(고요우킨레이)를 명령했다. 이 자금은 막부 금고에 보관하지 않고 상인들이 관리하며, 다이묘의 융자 신청 시 오사카 마치 부교쇼(町奉行所)가 상환을 보증하여 대출하는 방식이었다. 연 8% 이자 중 막부는 2.5%, 상인은 5.5%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다이묘의 상환 지체로 상인들은 대출을 꺼렸고, 덴메이 5년(1785년) 다이묘 측 年貢(연공)을 담보로 이자율 7%(막부 상납 1%) 조건의 御用金令(고요우킨레이)이 재발령되었다. 덴메이 대기근으로 다이묘 자금 조달 문제가 심각해져 다이묘 구제, 막부 재정 지출 감소, 새 재원 창출을 목표로 했으나, 상인 융자에 강제성이 없어 실효 없이 덴메이 6년(1786년) 중지되었다.[9]御用金令(고요우킨레이) 실패 후 덴메이 6년(1786년) 貸金会所(대금회소) 설립이 구상되었다. 이는 일종의 '정부계 은행', '国債(국채)'로 볼 수 있는 선진적 시도였다. 덴메이 대기근 속 재정난에 처한 다이묘 대상 자금 대출을 위해, 각국 사찰·山伏(산복)은 최고 15냥, 전국 농민은 토지 100석당 은 25匁(문), 상인은 주택 間口(간구, 가옥 너비) 1間(간)당 은 3문을 5년간 매년 막부에 납부하게 했다. 貸金会所(대금회소)를 통한 연 7% 이자 대출 후, 5년 뒤 대출 이자에서 수수료를 제외한 이자를 출자자에게 상환하는 구조였다. 전 국민 강제 징수와 5년 후 이자 지급은 현대에도 통용될 만한 선진적 시도였으나, 덴메이 대기근 속 '증세'로 인식되어 반발이 컸다. 다이묘 역시 저금리 이점에도 불구, 영민(농민·상인) 자금 차입 및 막부에 번 내정 노출 우려로 반발, 결국 발령 2개월 후 관동 대홍수 등으로 御用金令(고요우킨레이)은 폐지되었다.
5. 평가
다누마 오키쓰구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엇갈린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막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막부 재정이 개선되고 경기가 좋아졌다는 점, 히라가 겐나이 등과 교류하며 난학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사농공상에 얽매이지 않는 실력주의 기반 인재 등용을 시도하는 등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 있다.
반면, 뇌물 정치가 만연하여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존재한다. 또한 급격한 개혁 추진은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으며, 덴메이 대기근 등 자연재해와 기근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민생이 악화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오이시 신사부로는 다누마가 직접 부정을 저질렀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실각 후 정적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등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지타 사토루는 오이시의 주장이 문서 오독에 의한 것이며, 결국 다누마는 뇌물을 받았고 청렴한 인물이라는 해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5. 1. 긍정적 평가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를 중심으로 한 막부 각료들은 막부의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막부 재정이 개선되고 경기도 좋아졌다.[19]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특산물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에조치 개척 시도, 외국과의 무역 확대 등을 통해 막부 재정을 일시적으로 개선하고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히라가 겐나이 등과 교류하며 난학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19] 사농공상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주의에 근거한 인재 등용을 시도하는 등 개방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19]
에조치 개발을 추진하여 일본의 영토 확장과 자원 확보에 관심을 가졌다.
가와지 도시모는 간조쇼(勘定所) 등에서는 지금도 이시타니 기요마사가 정한 것을 기준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이시타니를 "호걸"이라고 높이 평가했고, 그를 등용한 다누마도 "정직한 호걸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존 휘트니 홀은 ''Tanuma Okitsugu, 1719-1788, forerunner of modern Japan''(1955년)에서 "오키쓰구는 근대 일본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5. 2. 부정적 평가
다누마 오키쓰구 시대에는 뇌물 정치가 만연하여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부정부패가 심화되었다.[16]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등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특권을 얻기 위한 뇌물 제공이 성행했으며, "관리의 아이는 손을 잘 잡는다"거나 "관리의 굳은 뼈는 돼지이빨 배(猪牙舟)에 실린다"와 같이 풍자될 정도였다.[16]급격한 개혁 추진은 신분 질서를 중시하는 보수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다.[23] 사농공상에 얽매이지 않고 실력주의에 근거한 인재 등용을 시도했지만, 이는 신분제와 주자학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막부 각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덴메이 대기근과 같은 자연재해와 기근에 대한 대처도 미흡하여 민생이 악화되었다.[23] 아사마산 대분화 등의 재해가 발생하고 농촌이 황폐화된 상황에서, 다누마의 대책 실패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오이시 신사부로(大石慎三郎)는 다누마가 직접 부정을 저질렀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실각 후 정적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등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센다이번(仙台藩) 번주 다테 시게무라(伊達重村)로부터의 뇌물을 거절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17]
그러나 후지타 사토루(藤田覚)는 오이시의 주장이 문서 오독에 의한 것이며, 결국 다누마는 뇌물을 받았고 청렴한 인물이라는 해석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11] 다누마 시대는 뇌물이 특히 성행한 시대였지만, 뇌물을 받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다누마는 당시 독재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뇌물 공세의 대상이 되어 더욱 눈에 띄는 존재였다.
6. 인맥
다누마 오키쓰구는 막부 내 권력 유지를 위해 혼인 관계를 통한 인맥을 구축했다.[20] 장남 다누마 오키토모는 와카도시요리에 취임하는 등 이례적인 출세를 했다.[20]
센다이번 의사 구도 헤이스케는 닥쳐오는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적왜풍설고』를 덴메이 3년(1783년) 당시 막부 로주였던 다누마 오키쓰구에게 헌상했는데, 이는 다누마의 에조치 개발의 원점이 되었다.
다누마는 발명가로 유명했던 히라가 겐나이를 매우 총애했다.
7. 가신
다누마 오키쓰구의 가신들은 정규 무사가 아닌 낭인이나 농민 출신이 많았으며, 다른 가문에서는 "이색적인 가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참신한 인재 등용이 다누마 가문 특유의 가풍을 만들었다고 여겨진다.
이름 | 출신 및 설명 |
---|---|
이노우에 이오리(井上伊織) | 오미 가가군 출신. 휘는 요시노리(良矩). 낭인이었던 아버지 이노우에 군타유(井上郡太夫)와 달리 16세부터 다누마 가문을 섬기다 22세에 가로가 되었다. 오키쓰구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처음에는 이노우에 간지(井上寛司)였으나, 오키쓰구의 요청으로 이오리로 개명했다. 사가라성 축성을 지휘했다. 후에 오키쓰구로부터 영대 가로직을 받았고, 자손들은 대대로 다누마 가문에 봉직했다. |
미우라 쇼지(三浦庄司) | 비고 후쿠야마 영내 농가 출신(일설에는 에도 시민이라고도 하며, 어느 쪽이든 무사는 아니었다). 다누마 가신의 양자가 되어 용인을 맡았고, 오키쓰구의 좋은 상담역이었다고 한다. |
구라미 긴타유(倉見金太夫) | 에도 주재 가로. 휘는 쓰네사다(庸貞). 오키쓰구의 신임이 두터웠고, 가중에서도 자비로운 인정파였다고 한다. 아내는 오키쓰구 부인의 자매였으며, 오키쓰구의 처남이었다. 생몰년은 불명이나, 오키쓰구 실각 후에도 오키쓰구의 손자인 다누마 요시아키를 섬겼다. |
가가미 규자에몬(各務久左衛門) | 가로. 깃본의 삼남으로, 처음에는 메부케의 와키사카씨를 섬겼으나, 오키쓰구의 요청으로 다누마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산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예의 달인이었고, 또한 오키쓰구와 마찬가지로 신앙심이 두터운 인품이었다고 한다. 오키쓰구 서거 다음 해에 사망했다. |
스토 지로베에(須藤治郎兵衛) | 호조류 군학을 배운 인물로, 에도성 수리를 맡은 적이 있으며, 사가라 축성에서는 그 기량을 발휘했다. 성 완공 후에는 오키쓰구로부터 포상으로 오용인의 지위를 받았다. |
후카야 이치로에몬(深谷市郎右衛門) | 가로. 심곡가는 오키쓰구의 아버지인 다누마 요리유키(田沼意行) 대부터 섬겼고, 시로에몬은 불과 23세에 오키쓰구의 가로가 되었다. 줄곧 에도 가로로 활약하며, 로주로 활약했던 오키쓰구를 뒤에서 지원하는 인물이었다. |
미요시 시로베에(三好四郎兵衛) | 가로. 이름은 마사쓰네(方庸). 사가라의 회선問屋에서 태어나 25세에 능 배우를 목표로 에도에 갔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서예가인 것을 인정받아 다누마 가문에 섬겼다. 사가라 축성 시에는 사가라의 풍토와 풍습에 정통하여 현지에 가로로 파견되었다. 성 완공 후에는 성대 가로가 되었다. |
우시오다 유젠(潮田由膳) | 다누마 가문 측용인. |
8. 관련 작품
다누마 오키쓰구를 주인공 또는 주요 등장인물로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소설'''
- 야마모토 슈고로, 《영화물어》(1953년)
- 무라카미 겐조, 《다누마 오지》(1985년)
- 사토 마사미, 《슈덴의 세》(1988년)
- 히라이와 쿄우에, 《물고기가 사는 성》(2002년)
- 타카토모 카즈오, 《청운의 사다리》(2009년)
- 무라키 아라시, 《다시 우도》(2024년)
- 이노우에 히사시, 『표리겐나이 개구리 전쟁』
- 후지사와 슈우헤이, 『암중의 꼭두각시(闇の傀儡師)』
- 이케나미 쇼타로, 『검객 상인(剣客商売)』 시리즈
- 사에키 야스히데, 『졸음 잠든 이와네(居眠り磐音)』 시리즈
- 이마무라 쇼고, 『우슈 보로토비구미(羽州ぼろ鳶組)』 시리즈
- 히메츠키 아오이, 『御庭番의 2대째』 시리즈
- 스기야마 다이지로, 『3번째 사무라이 이익과 인(さんばん侍 利と仁)』 시리즈
- 키안 유키오, 『떠돌이 동심 암재판(はぐれ同心闇裁き)』 시리즈
'''만화'''
- 이시노모리 쇼타로, 『헤이가 겐나이 「개국신서」보다 나나츠메코조』
- 미나모토 타로, 『풍운아들』
- 요시나가 후미, 『대오』(남녀 역전 설정)
'''영화'''
- 《검광앵화설》(1941년, 닛카쓰, 배우: 오가와 타카시)
- 《후리소데 타이헤이키》(1956년, 도에이, 배우: 아오야기 류타로)
- 《자색두건》(1958년, 도에이, 배우: 야마무라 소)
- 《그림자 법사 포물첩》(1959년, 신토호, 배우: 사사키 다카마루)
- 《속 라이덴》(1959년, 신토호, 배우: 히로세 코우지)
- 《닌술사와 세 명의 딸》(1961년, 도에이, 배우: 카가 쿠니오)
- 《하야부사 다이묘》(1961년, 도에이, 배우: 오자와 에이타로)
- 《하치만 햐쿠큐로》(1962년, 도에이, 배우: 카가와 료스케)
- 《마보로시 텐구》(1962년, 도에이, 배우: 야마가타 이사오)
- 《그림자 사냥꾼》(1972년, 도호, 배우: 탄바 테츠로)
- 《에로 장군과 21명의 애첩》(1972년, 도에이, 배우: 안베 토오루)
- 《우타마로 꿈인 줄 알았다면》(1977년, 배우: 오카다 에이지)
- 《어둠의 사냥꾼》(1979년, 쇼치쿠, 배우: 탄바 테츠로)
- 《놈 잡는 사무라이》(2018년, 도호, 배우: 카츠라 붕시)
- 《잠꾸러기 이와네》(2019년, 쇼치쿠, 배우: 니시무라 마사히코)
'''드라마'''
- 《대오》(1968년, 간사이테레비, 연기: 가와즈 세이자부로)
- 《천하어면》(1971년, NHK 금요일 시대극, 연기: 나카타니 쇼)
- 《자두건》(1972년, 도쿄 12채널, 연기: 아쓰쿠시 고타이)
- 《검객상매(가토 고・야마가타 이사무판)》(1973년, 후지테레비, 연기: 마쓰무라 다쓰오)
- 《에도의 매, 용무방범과첩》(1978년, 텔레비 아사히, 연기: 오카다 에이지)
- 《어둠을 꿰뚫어라》(1981년, 간사이테레비, 연기: 미쿠니 렌타로)
- 《검객상매(가토 고・나카무라 마타고로판)》(1982년, 후지테레비, 연기: 오자와 에이타로)
- 《어둠의 꼭두각시》(1982년, 후지테레비, 연기: 니시자와 도시아키)
- 《대오》(1983년, 간사이테레비, 연기: 미키모토 신스케)
- 《영화이야기》(1983년, TBS, 연기: 모리시게 구야)
- 《훨훨 날아라! 헤이가 겐나이》(1989년, TBS 내셔널극장, 연기: 후지오카 타쿠야)
- 《쾌걸 흑두건》(1990년, TBS, 연기: 나가토 유지)
- 《대에도수색망 평성 제1시리즈》(1991년, 텔레비 도쿄, 연기: 후지오카 타쿠야)
- 《대에도수색망 평성 제2시리즈》(1992년, 텔레비 도쿄, 연기: 아오키 요시로)
- 《전하님 바람둥이 숨겨진 여행》(1994년, 텔레비 아사히, 연기: 엔도 타쓰로)
- 《대에도풍운전》(1994년, NHK 금요일 시대극, 원작 ‘영화이야기’, 연기: 히라 칸지로)
- 《8대 장군 요시무네》(1995년, NHK 대하드라마, 연기: 고바야시 켄)
- 《바람이 빛나는 검〜팔악당 비문》(1997년, NHK 신정 시대극, 원작 ‘어둠의 꼭두각시’, 연기: 쓰가와 마사히코)
- 《검객상매(후지타 마코토・와타나베 아쓰로→야마구치 바키야판)》(1998년, 후지테레비, 연기: 히라 칸지로)
- 《은밀비첩》(2011년, NHK 신정 시대극, 연기: 사사노 타카시)
- 《검객상매(키타노미야 킨야・사이토 고판)》(2012년, 후지테레비, 연기: 쿠니무라 준)
- 《대에도수색망 2015〜은밀동심, 악을 벤다!(2015년, 텔레비 도쿄, 연기: 사가와 테쓰로)
- 《대오 「제1부〜최흉의 여자〜」》(2016년, 후지테레비, 연기: 아오노 토시유키)
- 《양염의 辻 완결편〜잠꾸러기 이와네 에도이야기〜》(2017년, NHK 신정 시대극, 원작 ‘잠꾸러기 이와네’, 연기: 나가츠카 교조)
- 《풍운아들 〜란학혁명(레볼루시온)편〜》(2018년, NHK 신정 시대극, 연기: 쿠사카리 마사오)
- 《대오》(2023년, NHK 드라마 10, 연기: 토우마 아미→마쓰시타 나오)(남녀 역전 설정)
- 《대오》(2024년, 후지테레비, 연기: 야스다 아키라)
- 《베라보우〜쓰타무라 에이카노 유메바나시〜》(2025년 예정, NHK 대하드라마, 연기: 와타나베 켄)
'''게임'''
- 《대에도 르네상스》(1997년, 세가 새턴, 팩인소프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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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沼意次の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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